가짜 뉴스와 경쟁하려면 왜 서사 구조의 힘이 필요한가
“과학자들은 이미 서사 구조를 이용하고 있다. 이제 허위정보와 싸우는 데 그 힘을 써야한다.” -랜디 올슨
- 분류되지 않음
- 4월 4, 2023
인터뷰: 아이 카노(Ai Kano)
편집: 마크 벤자민 M. (Mark Benjamin M.
사람들에게 과학적 내용을 설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대부분 사람들이 흥미를 갖기 어려운 내용이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런 점은 가짜 뉴스와 음모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았던 코로나19 당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과학적 진실은 왜 주의를 끌지 못하는 걸까? 가짜 뉴스가 할 수 있는 일을 왜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그 대답을 전 해양생물학자이자 현재 영화감독인 랜디 올슨 (Randy Olson)에게서 찾아보고자 한다. 랜디는 과학적 지식에,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계가 잘 이해하고 있는 서사 구조의 힘을 결합시킨 몇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그 밖에 과학적 배경을 활용한 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쓰고 감독했으며 과학 커뮤니케이션과 기타 정보량이 막대한 분야의 저서 10권을 출판했다. 2021년 12월 팬데믹 기간 중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에 대해 랜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2시간 이상 진행된 온라인 인터뷰는 지면과 명료함을 고려하여 편집되었다.
선생님은 과학자, 그 중에서도 해양 생물학자이셨는데요. 나중에 영화 쪽으로 돌리셨죠. 과학이 어떤 식으로 소통되는지 보셨고 콘텐츠를 흥미롭게 만드는 방법도 아실 텐데요. 허위정보가 과학적 정보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허위정보가 과학적 정보보다 더 흥미롭거나 매력적인가요?
결국은 서사 구조의 힘이죠. 한 세기 이상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서사 구조를 이용해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고 나아가 이끌어왔어요. 하지만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과학계는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어요. “팬데믹이 자본가들이나 사악한 제약회사가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또는 어떤 나라에서 화학 무기로 만들었다”는 등의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는 동안 과학계는 두 손 놓고 있었지요.
팬데믹을 둘러싼 미국—그리고 세계—에서의 재앙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1970년대에 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반과학운동—이렇게 이름 붙여야 되겠죠—은 과학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자기 나름의 진실이 있었으니까요.
이 움직임은 1970-80년대에는 미미하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1990년대, 200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무해하고 재미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고 주류에 진입했습니다. 오늘날 “반(反) 백신” 운동(그 자체로 반[反]과학)은 미국에만 지지자가 수천만 명에 이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이런 변화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어요.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학을 전달하기 위한 훈련은 받은 적이 없었죠. 지난 세기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권위적인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을 누군가 공격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거죠.
2005년에 진화생물학자 친구들이 심각한 반 과학 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어요. 연설 도중에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조롱을 퍼붓곤 한다는 거였어요.
2006년 나는 도도새 무리: 진화–지적 설계의 서커스 (Flock of Dodos: The Evolution-Intelligent Design Circus)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애초부터 진화론자들이 그 제목을 보면 “와, 드디어 우리를 공격하고 말살하려던 사람들을 공격하는 영화가 나왔군”하고 생각하리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제 영화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죠. 미국의 진화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영화였으니까요. 저는 “어느 쪽이 더 큰 도도새 무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엉뚱한 지적 설계라는 반 과학적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공공 행사나 토론회에서 그들에게 둘러싸이는 과학자들일까요.
영화는 매우 성공적이었어요. 이 영화는 쇼타임(Showtime) 채널에서 2년간 전국적으로 방영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유머가 큰 몫을 했죠. 단순히 사실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오락적 요소가 강하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질문(“지적 설계 운동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을 둘러싼 탄탄한 서사 구조가 있었어요.
매스컴에서는 결국 단순함과 반복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사실을 포착해서 계속 되풀이하는 거에요. 하지만 과학에서는 기본적인 서사 구조 원칙과 적절한 태도가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 지금과 같이 정부(그리고, 주도적인 과학자들)에 대한 믿음이 희박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팬데믹 기간 중 과학자, 정치가, 관공서의 비상 커뮤니케이션을 스토리텔링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2016년 미국은 반 과학적인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취임하고 처음 한 일이 파리기후의정서, 파리 협정에서 탈퇴한 거였죠. 그것은 전체 과학 커뮤니티에 대한 엄청난 경고 사격이었습니다. 대통령이 과학에 대해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국내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반 과학적 대통령이 온갖 이슈에 대해 반 과학적 의견을 쏟아내었죠. 과학계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대책도 아이디어도 없었고요.
일부에서는 오바마 정부에 팬데믹 대비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매스컴을 어떻게 다룰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큰 약점입니다. 과학계가 매스컴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요.
미국은 미디어 사회인데, 과학자들이 미디어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필요한 해결책의 절반밖에 쓸 수가 없어요. 연구는 할 수 있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지를 몰라요.
바이든 대통령은 선출되자 가장 먼저 자문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전문가 16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면면을 살펴보면 박사, 의사, 공공보건 과학자 등이에요. 커뮤니케이션 관련은 한 사람도 없어요.
예상하셨겠지만 자문위원회는 놀라우리만큼 혁신적인 작업을 주도하여 백신 생산에 성공했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반의 성공이죠. 이제 백신은 있어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을까요.
2020년 10월, 바이든 대통령 자문위원회 위원인 마이클 오스터홀름(Dr. Michael Osterholm) 미네소타 대학 감염병 연구 및 정책 센터 소장이 NBC의 밋 더 프레스(Meet the Press)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데 실패했고,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탓에 사람들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이야기의 힘을 이용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그 말에 저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에게 연락을 했고, 며칠 동안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약 4개월간 함께 작업하면서, 그가 팬데믹 발생 이후 해오고 있는 작업들을 자신의 팟캐스트로 알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TV에 얼굴을 비추는 저명한 과학자들 중 문제의 다른 절반, 즉 일반 대중에게 그 필요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없다면 백신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한 사람은 마이클 오스터홀름 박사뿐이었죠.
저술에서 서사 스펙트럼 개념과 AAA (And, And, And;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ABT (And, But, Therefore; 그리고, 그러나, 그렇지만), DHY (Despite, However, Yet;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러나) 템플릿을 소개하셨는데요. 이 개념들로 사람들이 백신에 대해 불신하거나 부작용을 두려워하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네. 일단 DHY 구조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DHY는 여러 서사 갈래를 빠르게 도입하여 듣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백신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정부가 충분히 테스트할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연구소에서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대체 의학은 어떤가, 라고 말하는 식이죠.
DHY라는 용어는 ‘But’을 제외하면 반대되는 내용을 시작할 때 가장 흔히 쓰는 세 단어인 ‘Despite,’ ‘However,’ ‘Yet’ 과 같은 단어를 써서 모순되는 새로운 내용을 불러들이는 여러 서사 갈래를 뜻하는데요. 서사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내용이 난삽해지고 결국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기후 변화 문제를 보세요. 90년대와 2000년대 초 주목을 끌기 시작한 이슈인데요. 대중은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저는 2002년에 비로소 듣기 시작했어요. 2003년 HBO 에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이 진행되었어요.
그러다 2005년 여름 허리케인이 다섯 차례나 미국을 강타했어요. 환경운동가들은 큰 충격을 받아 그해 여름 기후가 변했다, 이제 우리는 매년 허리케인이 일어날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10년 동안은 큰 허리케인이 없었죠. 그럼에도 그 충격의 여파로 앨 고어(Al Gore)를 중심으로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급히 만들어져 서사 구조가 엉성했어요. 재앙으로 시작해서, 재앙, 재앙으로 갔죠. 서사 구조를 보면 서사의 세 가지 힘인 “합의,” “모순,” “결말”이 기본적인 흐름이 없어요.
문제들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합의”에 대해 소통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통해 청중에게 다가가는 거죠.
그런 영화의 처음에서, 분명하고 권위있는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점은 이겁니다. 옛날, 전 지구를 위협했던 거대한 대기의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 국가들이 단합하여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 문제는 오존 구멍이었고 해결책은 몬트리올 의정서였다. 하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해결을 향해 가고 있다. 그때까지 이루어낸 최대의 환경 협약이었고 기상 과학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그랬더라면 기상 과학자들이 우리가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크게 공헌해왔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 말은 이제 지구 온난화라는 새로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그들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고요.
이것이 바로 소통의 기본 심리학입니다. 뇌는 던져진 문제를 처음부터 처리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아요.
미디어의 코로나19 보도는 부정확하고 편향적인 기사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저서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 서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고 쓰셨는데요. 사람들은 사회적 긴급 상황에서 공포와 불안 때문에 어쩌면 “But”이나 “Therefore”를 빼거나 더해서 이야기를 비틀고 싶어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위정보(disinformation)를 조장하게 되고요.
미디어는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시청률과 금전적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물론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 중에 양심적이고 바르게 행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 커뮤니티가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끝없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미디어는 가장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큰 사건, 가장 센세이셔널한 이야기만을 보도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킬러 박테리아가 지역 공원에 나타나 어린이 모두 사망” 따위의 뉴스죠. 과장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요. 그러니 모든 홍보는 전쟁입니다. 서사를 통제하려는 전면전이죠.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과학은 이 “서사(narrative)”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해요. 과학자들은 서사 구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정보를 나눠줄 뿐이죠. 이 서사 구조가 우리가 십년 동안 개발해온 ABT(And, But, Therefore) 틀의 핵심이고요.
과학자들과 정부 대변인들이 효과적으로 소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과학계와 미디어 계(혹은 서사의 세계)는 극과 극의 자세를 갖고 있어요. 과학자들은 큰 수를 좋아합니다. 실험을 할 때는 대규모 표본을 원하고, 표본이 클수록 더 마음이 편하지요.
과학자들이 싫어하는 것은 표본이 작은 연구입니다. 큰 학술회의에 갔는데 누군가 발표를 해요. 흥미롭고 관심이 가요. 그러다 n=2를 발견합니다. 이걸 두 번 측정하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과학자들은 그런 것을 폐부 깊은 곳, 문화적인 수준에서 싫어합니다.
저도 과학자로서 단일 사례, 즉 일화를 경계하도록 훈련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토끼 한 마리가 나무 위로 뛰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토끼들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걸 몇 번이나 보았죠? 한 번. 그러면 그건 그냥 일화예요. 그 말을 들어서는 안되는 거죠. 과학자들은 일화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강력한 소통의 힘은 구체적인 것에 있습니다. 이야기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하나의 캐릭터, 하나의 물건, 한 가지 속성, 한 순간에 대해 말할 때입니다. 소통에서 일화는 허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강력하며 널리 쓰입니다.
예를 들어, 뉴요커 지를 아무 호나 펼쳐보면 미국의 이민 등 큰 주제에 대한 특집 기사가 있을 겁니다. 기사는 보통 일화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리오 그란데 강을 헤엄쳐 건너와 미국에 밀입국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죠. 이런 일화를 통해 독자들은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더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고요. 이것이 소통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요. 하지만 똑 같은 일화가 과학에서는 기피 대상이고요.
이 간극은 엄청나게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간극을 메워야 해요. ABT 틀은 이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과학에서 경제학, 정치학에서 법, 엔터테인먼트와 비즈니스 모든 영역에서 서사 구조의 단일한 모델이 있음을 깨닫는 거죠.
ABT는 놀라울 만큼 강력한 도구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배울 수 없어요. “내러티브 짐(The Narrative Gym)”을 열심히 다녀야 해요. 이 책의 요지는 사람들이 운동하러 헬스클럽에 가듯이 서사 구조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복해서 연습해야 해요.
사실만을 말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나 해석을 표현하기를 꺼리는 과학자들의 심리에 대해 쓰셨는데요. 같은 이유로 우리도 매일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종용하느라 애를 먹고 있어요. 한편 일반 대중은 전문가의 진실, 무엇을 믿고,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진실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과학 커뮤니티에서는 이 간극을 “과학 문해력”으로 설명하기도 하고요. 저는 이 간극이 점점 더 과학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과학계 전체가 과학이 두 가지 주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연구를 하는 부분과 그 결과를 소통하는 부분이요.
유감스럽게도 이 두 요소는 같지 않습니다. 연구를 할 때는 정확하고, 극도로 신중하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되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 단 하나의 실수도 없도록 하죠. 그런 다음 동료들의 리뷰를 받아 발표할 내용이 절대적으로 옳은지 확인하고요.
하지만 소통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가 없어요. 완벽한 소통 방법이란 없으니까요. 너무나도 다양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반복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직관을 개발하고, 그걸 되풀이하는 것뿐이죠. 뭔가를 소통할 때는 일단 입밖에 내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면 실패하게 되니까요.
이 간극을 과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초대로 질병통제예방센터(CDC)나 NASA에 갔을 때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두 곳 모두 과학자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이 과학 기관들은 문화가 서로 달라요. 과학자들은 소통되어야 할 내용을 알지만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들은 소통 방법은 알지만 소통 대상인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있고요.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양쪽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NASA에서 마지막 일정이 끝난 뒤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여덟 명 정도와 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반원형으로 둘러 앉아 각자 돌아가며 과학자들과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했던 여성은 도중에 울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한 중견 과학자를 인터뷰했는데, 거기서 과학자는 자기가 진행중이 프로젝트 15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그 중 세 가지 흥미로운 내용을 뽑아 기사화했어요. 그 기사가 나간 날 과학자는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얘기했던 다른 내용은 다 어디 간 거죠? 이거, 이거, 이거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하나도 기사에 나오지 않았네요.” 그녀가 지면에 모두 실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요.
그들은 두 개의 전혀 다른 문화에 속해 있는 거죠. 인문학 대 과학의 구도라 할까요. ABT는 그 간극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되는 틀입니다. 우리는 ABT 과정을 통해 양쪽에게 서사 훈련을 진행합니다. 참가자의 2/3 정도는 과학자, 나머지 1/3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들이죠.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나 “과학 커뮤니케이터” 같은 용어들은 과학 정보의 중요성이 자명하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저는 선생님의 저서에서 “과학은 다른 정보나 이야기에 비해 특별하지 않다.”라는 관념에 공감합니다.
이야기가 전 지구적으로 대량 소비되는 시대,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에 넘쳐나는 콘텐츠는 사람들의 주의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아직도 일방적이고 대개 과학에는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엔터테인먼트 업계나 할리우드가 사용하는 도구를 써서 이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보통 자기 대신 소통을 할 사람이 자신의 연구 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과학자 시절에 그랬고요. 제 분야를 잘 알기를 바랬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커뮤니케이터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이런 경향은 과학 기관에서 새로운 디렉터를 채용할 때도 나타나요. “과학을 아는,” 즉 중요한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을 찾는 경향이죠. “사람을 아는” 사람은 찾지 않아요.
그 결과—이런 결과를 계속해서 봅니다—대규모 기관의 디렉터들은 대인관계 기술이 없어요. 결국 기관에 인력 문제가 끊이지 않죠. 이유 중 하나는 일반인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고요. 관리 기술이 있는 사람을 뽑고 과학 쪽 자문을 붙였더라면 피해갈 수 있었을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게 되는 거죠.
연구에 바쁜 연구자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할지 딜레마입니다. 훌륭한 과학자이면서 엔터테이너인 연구자는 드물지요. 최근의 예로 노벨상 수상자이자 iPS 세포 연구소 소장인 야마나카 신야 교수가 있습니다.
최근 그가 디렉터 직을 사임하고 연구에 집중하겠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TV 출연이나 마라톤 경주 등으로 기관 홍보에 앞장서 왔는데 그 때문에 실제로 연구할 시간을 뺏겨야 했죠. 우리는 과학자들이 훌륭한 이야기꾼이 되기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 간극을 메워야 할까요?
과학자들이 “이야기꾼”이 될 필요는 없어요. 서사 구조를 이해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세 가지 성질—기본적 설정, 문제, 해결의 역학—을 알고 그들의 작업이 똑 같은 기본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됩니다.
일단 서사 구조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 “단일 서사”의 압도적인 힘을 인정하게 됩니다. 청중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단일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요.
팬데믹이 일어나고 과학자, 의사,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죄다 TV 에 나오면서 이런 역학이 통제 불능이 되어 버렸어요. 그들 중 많은 수는 뭘 어떻게 할지도 몰랐고요. 정보는 있지만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던 거죠. 미디어에 노출되고 훈련되면서 수년에 걸쳐 개발되는 직관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과학과 미디어 전문가의 협업이 필요한 겁니다. 좋은 예가 바로 U.S.C.의 할리우드, 건강 및 사회 프로젝트(Hollywood, Health & Society project; HH&S)인데요. 25년 전 이 프로젝트를 창립했고 현재도 전무이사를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제 친구인 마티 카플란(Marty Kaplan)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열렬히 지지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결국 적절한 사람들이 적절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거거든요.
올바른 커뮤니케이터(프라임 시간대 TV 프로그램 작가)에게 올바른 정보(예: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공중보건 팩트 시트)를 전달하고, 전문 과학 자문을 통해 전문가가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이것이 저의 단순한 제안입니다. 전문가들이 자신이 훈련 받은 일을 하도록 하는 것. 예를 들어,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백악관처럼 복잡한 메시지를 명확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훈련 받은 대변인이 왜 한 명도 없을까요?
HH&S는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과학자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지 말자고요. 대신 전문 영화 제작자와 협력하여 올바른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작가들에게 이야기를 하게 하고요. 과학 전문가들은 첨단 정보를 작가들에게 주고 함께 일할 수 있게 하고요. 그 분야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쓰려고 하지 말자는 겁니다. 아무도 영화 감독들이 심장 개복 수술을 하기를 바라지는 않잖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마이클 크라이튼은 제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과학과 미디어라는 두 가지 ‘언어‘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그는 실제 과학자(솔크 연구소의 박사후 연구원까지 지낸 생의학 연구자)이자 대중 미디어 제작자(<쥬라기 공원>, <E.R.> 등 영화, 소설, TV 프로그램 제작자)였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 했지만 과학계는 늘 그렇듯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돕겠다는 목표로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에세이를 쓰고, 강연을 하고, 매스미디어의 도전에 대해 과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는 생의학계를 떠나기 전인 1975년 12월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의료 난독화: 구조와 기능(Medical Obfuscation: Structure and Function)’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발표했는데요. 이 이 논문에서 세 편의 논문을 검토한 후 난독화(비교적 간단한 것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의 10가지 특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과학계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백 년 전에는 과학자들이 명료함과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쓰고, 소통했다고요. 그들은 자기 말의 핵심을 전하는 법을 알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난독화’가 소통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그것이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현재 난독화는 그 어느때보다 더 심각한데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1999년 마이클 크라이튼은 미국과학진흥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Advancement of Science) 기조연설에서 과학계에 대한 건설적인 마지막 강연을 했어요. 이 연설에서 그는 과학자들은 미디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반과학 운동 대처 방법의 청사진이 될 수 있을 건설적인 조언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결국 그 자신도 그 중 하나가 되고 말았죠.
마이클 크라이튼은 과학계가 미디어와 반과학 운동을 다루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과학자들은 대체로 그를 할리우드의 어릿광대 정도로 치부했어요. 항상 그게 문제였죠. 과학자들이 그토록 곧이곧대로만 생각하는 경향. 그래서 결국 그들은 눈 앞에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죠.
지난 2-3년간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크라이튼이 지적했던 대로 우리 모두가 100년 전에 더 사고나 소통면에서 더 나았다는 거에요. 누군가 과학계 상층부에 있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과학 전체가 과학이 만들어낸 소음의 바다에 익사하기 전에요.
참고 문헌
랜디 올슨(Randy Olson) 저
- Houston, We Have a Narrative: Why Science Needs Story
- Don’t Be Such a Scientist: Talking Substance in an Age of Style
- Narrative Is Everything: The ABT Framework and Narrative Evolution
- The Narrative Gym
- Climate Communication’s Missed Opportunity and How to Fix It
기타 저자(랜디 올슨 추천)
- The One Thing by Gary W. Keller and Jay Papasan
- They Say, I Say by Gerald Graff and Cathy Birkenst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