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와 겨루려면 과학과 정책에 더 많은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학의 스토리텔링으로 과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케빈 파디안(Kevin Padian)-
- 분류되지 않음
- 4월 4, 2023
인터뷰: 아이 카노(Ai Kano)
편집: 제이콥 P. 반후튼(Jacob P. VanHouten)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거목임에도 케빈 파디안(Kevin Padian) 박사는 소탈하기 짝이 없었다. 흔히 괴짜 과학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헝클어진 머리에 후드 티를 입은 그는 편안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수수한 모습 뒤에는 예리하고 신랄한 교육자의 정신이 번득인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 통합 생물학 교수로 재직 중인 파디안 박사는 비행의 기원과 새의 용각류 공룡에서 진화 등 거시적 진화 문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연구 분야 외에도 과학 교육 및 대중 담론 개선의 옹호자로서, 학교에서 진화를 가르칠 것인지 “지적 설계”를 가르칠 것인지를 둘러싼 키츠밀러 대 도버 지역 학군(Kitzmiller v. Dover Area School District) 사건의 원고측 전문가 증인으로 활동했으며, which focused on the teaching of evolution versus “intelligent design” in schools, 1990년대 캘리포니아 과학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에 공헌하였고 K-12 학교 과학 교과서 검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03년 과학 대중화 부문 칼 세이건 상을 수상했다. “Narrative and ‘Anti-narrative’ in Science: How Scientists Tell Stories, and Don’t(과학의 서사와 ‘반 서사’: 과학자들이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는 것)” 등 약 200편의 과학 기사를 저술했으며 미국 과학진흥협회 펠로우이기도 한다.
사이언스톡(ScienceTalks)에서는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그의 견해와 어떻게 하면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팬데믹 기간 중 어려움을 가져온 과학에 대한 신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그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2022년 1월 진행되었고 지면과 명료함을 고려하여 편집되었음을 밝힌다.
먼저 경력 소개를 간단히 해주시겠습니까?
재미있게도, 저는 어릴 때 과학을 엉망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과학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당시 1950-60년대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우주개발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죠. 러시아가 최초의 위성을 발사하자 미국이 러시아에는 있는 과학 교육 프로그램이 없어서 뒤처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당시 10, 12, 14, 16세 대상 학교 교육에 보다 엄격한 과학 교육을 도입하려 했어요. 성공은 반반이었죠.
크렙스 회로처럼 복잡한 내용을 많이 배웠어요. 하지만 새와 벌, 주변 환경, 지질학,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죠.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광합성이나 그런 것들에 대한 매우 기술적이고 치밀한 내용을 배웠어요. 하지만, 10살이나 12살 때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하늘이 왜 푸른지 그런 걸 알고 싶잖아요.
어쨌든 과학을 전공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대학에 있을 때, 아주 훌륭한 교수님이 영감을 주셨고 그래서 늘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배운 적은 없었던 분야, 진화에 관련된 분야에 들어가게 되었죠. 지금까지 죽 이어졌고요. 석사 학위를 마쳤을 때, 저는 과학 교육 학위를 받았어요. 제가 배웠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과학을 가르쳐보고 싶었기 때문이죠.
몇 년 후 저는 훌륭한 과학 교사가 되기에는 과학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 박사학위를 받고, 고교 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버클리에 자리를 얻었죠. 그러는 동안 연구와 연구 문제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었고요. 연구에서 좋아했던 것은 연구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더 사물에 대해 잘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줄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운이 좋게도 연구와 교수직을 매우 좋아했어요. 물론 가르치는 일에는 대중 교육 과정이나 공공 영역에서 과학의 진실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포함됩니다.
왜 진화를 선택하셨나요? 수학이나 물리학에 비해 더 일반 대중이 흥미를 느낀다거나 그런 이유가 있었나요?
아니면 식물 생태학이었을 거에요. 저는 식물 생태학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분야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지 않습니다. 진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특히 우리 고생물학자들처럼 진화의 큰 그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공격을 받습니다].
그런 걸 좋아하지 않죠. 어느 지점까지는 창조주의자들과 반 과학자들이 그들이 종, 또는 창조된 종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변화가 일어남을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큰 전환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게 제가 하는 일이고요. 그들은 특히 제가 그들의 저작에서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라, 견해의 문제일 뿐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바라죠.
특히 미국에서는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영국 출판인 앤드류 멜로즈(Andrew Melrose)가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문제는 두 종류의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즉 종교적 박해를 피하려는 식민지 개척자들과 종교적 박해를 피하려 했는데 일단 이곳에 도착하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누구든 박해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이죠.
우리에게는 계몽 시대의 자녀인 제퍼슨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개방적이며 철학적인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종교 때문에 박해를 받아 건너온 청교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 단체를 설립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큰 전쟁을 하고 있어요. 우리 나라는 정교가 분리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절반밖에 믿지 않는 것 같아요.
그 결과 저는 제 일로 인해 공격 받아왔습니다. 경력 내내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내가 하는 연구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수백만 년에 걸쳐 화석 기록에서 제 관심 분야인 비행처럼 새로운 적응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 특징을 가진 동물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협적인 일이 될지 잘 알고 있었죠. 비행은 엄청난 일이거든요. 진화하기 매우 어렵죠.
반 진화론자들은 그런 일이 불가능한 척 하기를 좋아하죠. 하지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공룡 같은 동물들이 새가 되는 그런 변천 과정을 통해 형태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저는 비행의 진화에 대해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제마다 다소 변이가 있기는 하지만요. 어느 경우든 창조론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 과학자와 창조론자 사이의 갈등은 의학자와 가짜 뉴스와 기묘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음모론자 사이의 갈등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백신 접종 반대자 등을 상대하는 것과 과학을 부인하는 창조론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미국에는 계몽주의적 성향, 즉 과학적 탐구와 이해에 대해 합리적인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약 30% 정도입니다. 또 다른 30% 정도는 이러한 합리적 접근을 거부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나 다른 종교의 근본주의자입니다. 반과학주의자나 종교적 근본주의자와 공개 토론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그들의 세계관과 같은 지평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는 타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토론을 할 때는 어느 쪽이든 자기가 이해하는 내용과 그 이유, 이러한 이해의 기반이 되는 원칙,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틀렸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확립해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다른 과학자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 이를 알려주는 것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직업적으로 권장되고 의무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다른 종류의 세계관에는 그러한 제약이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는 있죠. 하지만 과학자는 자신이 틀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매일 되묻습니다. 스스로 묻지 않으면 친구와 동료들이 기꺼이 지적해 줄 것입니다.
나머지 40%는 그 중간에 있으며, 바로 제가 소통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 합리적인가입니다. 그렇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멋진 화석과 동식물이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정보를 생산하고, 가설을 테스트하고, 피어리뷰를 거쳐 출판하는 방법 등을 통해 우리의 발견이 합리적이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설득은 종교에 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연구 결과를 거부하는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기 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연구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뿐입니다.
코로나19와 함께 새로운 의학 연구 결과와 정부 정책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정치가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접근 방식과 권장 사항이 바뀌자 일부는 과학과 의학이 계속 처방을 바꾸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하고 불편을 호소했습니다. 종교는 대체로 변하지 않거나 변할 수 없는 교리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반면, 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새로운 발견을 이전의 것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때로 과학자들은 새로운 증거가 나타남에 따라 방향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로서 스토리텔링을 잘 한다면, 단순히 연구 방법과 결과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대중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연구와 과학 자체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지요. 보통 사람들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거나 새로운 주제를 배우면서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면 과학자와 더 쉽게 공감합니다. 과학은 테스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 철학적 측면에 호소력이 있었어요. 문학이나 음악처럼 사람들이 그저 받아들이거나 해석하는 것 이상이었죠. 과학은 커뮤니티가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커뮤니티에 의한 지식이었으며, 개발과 동의, 수정이 필요한 것. 저는 그런 것들이 매우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설명하는 데 애를 먹고 있죠. 그래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국 언론 상당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앤서니 파우치 박사 같은 분은 가능한 가장 단순하고 일관성 있고 정직한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뭐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뭐다, 그리고 우리의 제안은 이거고 이유는 이러저러하다. 때로 새로운 상황이 일어난다, 새로운 변종이 발생하거나, 확진자가 늘어나거나,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중단하거나, 확진자가 급증할 수 있다. 그러면 메시지를 변경해야 한다, 라는 식으로요.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고 필요하다면 마음을 바꾸는 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전문가가 옳고 오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전문가가 처방을 바꾸면 그들도 오류가 있는데 왜 그들을 믿어야 하나?하고 묻습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새로운 정보에 의한 혼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팬데믹 초기 마스크가 별로 없었을 때 CDC[질병통제예방센터]는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사재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마스크를 감염자들을 치료하느라 감염의 위험이 높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했습니다. 공급량이 보충되자 일반 대중에게 마스크 구매를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언론 전문가들이 이를 정책의 전환인 것처럼 보이게 말하도록 했습니다. 정책의 전환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과 정보에 따라 조언을 수정한 것에 불과했는데요. 세계적으로 의학 분야에서 가장 신뢰받는 기관이었던 CDC의 명성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크게 침해되었죠. 트럼프 대통령은 팬데믹으로 인해 여론 조사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다가, 제 생각에는 국내에서만 수십만 명의 사망을 발생시킨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이 공중 보건 악몽은 과학자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몇 년 전, 우리 대학의 위대한 언어학자이자 수사학자인 조지 라코프(George Lakoff)는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보도할 때 필요한 ‘진실 샌드위치‘라는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트럼프의 거짓말 중 하나를 보도할 때는 먼저 트럼프가 한 말을 전하고, 사건의 사실을 말한 다음 트럼프의 말이 왜 거짓말인지 설명하는 거죠. 이것이 진실 샌드위치 개념인데,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내 언론은 이렇게 했어야 했죠. 하지만, 언론은 이 두 가지 견해가 지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제시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신념을 갖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신을 맞을 필요가 없다고, 모두 사기라고 주장하다가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와서 최후의 순간에 개종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의료 및 비의료인들이, 당신들을 보고 싶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어요. 의사와 간호사들을 감염시키지 말라고요. 당신들이 한 선택 때문에 병상이 가득찼다고요. 이식, 암 치료, 주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당신들 때문에 자리가 없다고요. 이것이 공평한가요? 합리적인가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균형 잡힌 것이 늘 공평하지는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론에서 전염병학자들이 어머니 집의 지하실에서 작업하는 교육받지 않은 블로거를 50대 50으로 다루는 것은 공평하지 않죠. 당면한 문제에 대해 이들의 견해를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대중에게 공평하지 않아요. 제 (인정하건대 편향된) 견해로는 언론의 기능은 오늘날의 문제를 평가하고 그 복잡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균형과 공정은 다르다는 맥락에서, 특히 미국의 일부 언론인들이 뉴스를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자들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저는 매우 훌륭한 인재가 많은 학과에 속해 있고 다른 학과 동료들도 훌륭한 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관찰한 결과 많은 동료들이 자신과 비슷한 대학원생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멘토의 분신처럼요. 과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학생도 있는데, 교수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를 하고 학회에 참석하며 해당 주제에 대한 논문과 강연을 하는 학생을 배출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느낍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사회로부터 받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과 재미를 알리는 방법을 배워서 돌려주면 좋지 않을까요? 과학은 실험실에 들어가서 발견을 하고 나오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과학은 발견의 과정이며, 함께 일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실수를 하고,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다시 회의 테이블로 돌아오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제 동료들은 학생들이 다른 대학에서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우리 학생들이 언론, 과학 출판,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 또는 정부에 진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대단합니다. 자기 분야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정부 자문위원으로서 실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문제를 바꾸고, 세계 최고 학과에서 얻은 관점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자문 교수를 따라 똑같은 주제의 논문을 100편 쓰는 것보다 그것이 덜 중요할 이유가 있나요? 지난 10년 동안 대학원생들이 ‘과학과 사회‘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고 싶어 하고, 과학이 왜 중요한지 대중의 이해를 돕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어요.
과학은 어떻게 이야기를 더욱 강력하게 해서 소통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코로나19의 경우 과학자보다는 임상의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일하며 mRNA 기술 등을 개발하고 코로나바이러스 추적 방법을 구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접촉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턱에서 백신 접종을 찾는 코로나19 병동 환자들의 영상을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겁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의료 종사자들이 겪는 번아웃과 스트레스도 보여줘야 합니다. 이들은 직장을 그만두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고요. 마치 전쟁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임상의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촬영한다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에요. 이들은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고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과학에 대한 객관적인 토론으로는 불가능한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코로나19는 과학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논문에서 다양한 지식의 영역, 즉 과학, 종교, 세속의 영역을 다루셨는데요. 코로나가 마음과 정신의 문제라 하셨는데 이 세 가지 영역의 역할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수십 년 동안 종교인들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 대해 글을 써왔으며, 이를 전쟁의 은유로 표현했습니다. 20세기 내내 미국에서 있었던 창조론 운동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과학, 종교, 세속적 영역이 있다면 각 영역이 코로나19 위기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물어보세요. 과학은 질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야 멈출 수 있습니다. 정부나 사회 단체를 포함하는 세속 영역에서도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을 조정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에서 종교의 영역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신학에 대해 논할 수 있을 뿐, 다른 종류의 지식에 대해 주장할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영역에서 이상한 점은 정부 관리들이 이제 예방 접종에 대한 종교적 면제를 주장하는 시민들을 상대해야한다는 건데요. 대체 어떤 종교적 근거로 예방 접종을 믿지 않나요? 그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거나 암시하는 표준 종교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주장할 수 있지만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러한 주장에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개인 종교 때문에 미국에 소득세 납부 의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정부가 강제로 백신을 접종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 포럼에서 비접종자를 배제 할 권리가 있습니다. 백신은 매우 인기가 없지만 질병과 죽음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질병과 변종의 진행 과정에 대해 우리가 아는 만큼 알고 있다면 몇 가지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예방 접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비행기 탑승을 허용하고 있지만[이 인터뷰는 2021년 초에 진행], 모든 국가가 그렇지는 않아요. 그것은 세속적인 영역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대중은 어느 정도로 구체적인 방향과 명확한 진실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과학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파우치 박사처럼 하는 것, 과학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감염과 사망을 줄이기 위해 가장 신중한 과정에 대해 추천하는 겁니다. 하지만 매우 독재적인 정부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하게 만들기는 어렵죠. 중국에서 일부 효과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고요. 대부분의 정부는 안전벨트 착용, 좌측 또는 우측 주행, 신호등 준수 등과 같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겠지요. 공공건물에서 흡연을 금지할 수 있듯이요. 하지만 이런 행동의 결과는 다릅니다.
우선, 우리가 사람들이 공공건물에서 흡연하지 않기를 원하는 이유는 간접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니까요. 만일 도로에서 아무 방향으로나 운전할 수 있다면, 빨간 불에도 서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죠. 안전벨트나 에어백 없이 시속 100마일로 차를 몰다가 앞 유리를 뚫고 날아가 자신만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럴 권리가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원한다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권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거나 위험에 빠지게 할 권리는 없어요.
응급실 의사들은 때때로 오토바이 라이더를 “장기 기증자“라고 부릅니다. 법적 의무인 헬멧을 착용하지 않고 충돌 사고가 발생하면 일반적으로 머리가 엉망이 됩니다. 이들이 사망하면 손상되지 않은 장기를 기증할 수 있죠. 이러한 행동은 오토바이 라이더에게도 피해가 되지만, 사망하지 않고 광범위한 치료가 필요한 경우 치료 비용을 전담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 의료 시스템에 큰 부담이 됩니다. 게다가 의사와 간호사는 다른 환자를 치료하는 데 쓸 수도 있었을 시간을 뺏기게 되고요.
코로나도 비슷합니다. 우선,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사람은 흡연자처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또한 의료 시스템에도 상당한 부담을 줍니다. 여기에는 이러한 환자를 돌보는 데 필요한 인프라와 정부 기관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이들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비용에 중점을 두지 않죠. 그들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정치적이기 때문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병에 걸립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갖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통가에서 또 다른 해저 폭발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합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묻습니다. 글쎄요, 2021년 12월 11일 과학자들은 화산을 휴화산으로 보았지만, 한 달 후 폭발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은 잠정적이지만 발전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과학자들의 책임입니다.
저는 과학이 개방적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새로운 아이디어나 증거를 기꺼이 받아들이니까요. 하지만 머리가 비지는 않았죠. 아무 것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어떤 사실을 알거나 전혀 모르거나 하는 흑백논리에 빠지기 쉽죠. 하지만 우리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고 있어요. 지금 던져진 질문에 대해 100% 확신은 없다 할지라도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많은 국가의 전통적 교육은 권위적으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규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증거에 따라 바뀔 수 있는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해답입니다. 사람들은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확실성을 원합니다. 자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의사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물어본다면, 정직한 의사는 예상되는 결과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가 정직하게 설명하더라도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코로나 상황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확실한 대답을 원합니다. 만일 할 수 있는 최선은 백신을 맞는 것이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하면 일부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논문에서, 과학을 전달하는 일반적 방식에 대한 ‘탈학습’을 언급하셨습니다. 대중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학자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있지만, 대중이 연구 결과를 기꺼이 신뢰할 수 있도록 과학에 대한 관심을 더 불러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술 과학 출판물은 읽기가 매우 힘든 경우가 많죠. 저는 서사의 반대인 반(反) 서사라고 부릅니다. 과학 논문은 A에서 B, C, D로 이어지는 생각의 진행 과정, 즉 어떤 아이디어나 가설을 어떻게 떠올렸는지, 어떻게 점진적으로 진행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Z부터 시작해서 E, F, G, H로 돌아가서 방법을 설명하는 식으로 작성합니다. 그런 다음 일종의 문제 진술이 있지만 바로 세부 사항으로 넘어가죠. 그런 식으로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파악하기가 정말 어렵고 그저 결과를 나열한 것으로 보일 수 있죠. 저희 대학원 프로그램에서는 사람들에게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자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네이처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반(反) 서사를 밀어붙이고 싶은 욕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치지 않죠. 그러려면 죄 풀어헤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인간적인 요소를 끼워 넣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스토리텔링의 가장 좋은 예는 그린란드에서 전형적인 초기 수생 척추동물과 최초의 육상 척추동물 사이의 과도기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틱타알릭(Tiktaalik) 화석 발견에 관한 것입니다. 틱타알릭은 아직 육지로 갈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있는 곳과 주변 사물에 적응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에드워드 대슐러(Edward Daeschler), 닐 슈빈(Neil Shubin), 패리쉬 젠킨스 주니어(Farish Jenkins Jr.)가 쓴 이 동물의 발견에 관한 논문은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하지만, 발견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요. 닐이 온라인에 올린 이 동영상은 과학 보고서에는 없는 세부 사항으로 아주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도기적 종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특히 특정 연대와 환경, 특정 수심과 복잡성 때문에 세계 다른 곳의 다른 발견으로부터 이 지역에서 찾을 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지 등은 정말 놀랍고 멋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무언가를 찾기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의 과정, 여러 번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채석장을 찾아 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북극곰이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 채석장 가장자리에 소총을 들고 항상 대기하고 있었던 과정 등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스티브 게이츠(Steve Gatesy)는 땅을 파다가 두개골 뒷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죠. 그들은 그 존재를 예측하고 찾아내어 과학의 예측 가치를 입증했습니다. 고생물학자는 무작정 나가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물학자가 된다는 것은 트럭에 채집 도구와 삽, 맥주 상자를 잔뜩 싣고 사막을 돌아다니며 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에요. 연구팀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과학 프로젝트의 이러한 측면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동물에 대한 단순한 설명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 시절, 공화당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하고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를 하원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깅리치는 새로운 공화당 초선 의원들과 함께 연방 정부 해체 캠페인을 벌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삭감할 수 있는 것들을 검토하면서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정부 기관의 범위를 좁혔습니다.
여기서 미국 지질 조사국(US Geological Survey)와 NASA는 역사적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지질 조사국 예산은 삭감되었지만 NASA의 예산은 유지되었습니다. 이유요? NASA는 몇 가지 훌륭한 일을 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기술력을 과시할 만한 우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질 조사는 지진, 수질, 광물, 지반 이동, 강, 홍수, 제방 등 실제로 일반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다룹니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지질조사국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NASA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무 홍보의 중요성입니다.
약 20년 전, 국립과학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으려는 연구자들은 프로젝트에 공공 교육 요소를 포함시켜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어요. 이를 보고 버클리 고생물학 박물관에서는 진화의 이해와 과학의 이해에 관한 웹사이트를 하나씩 개설했습니다. 세 번째 웹사이트는 기후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프라를 통해 우리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전문 지식을 아웃소싱할 수 있었고, 직원들이 연구자들과 협력하여 웹 사이트뿐만 아니라 자체 사이트에서도 공유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개발하였죠. 거의 전액 외부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교육 및 홍보팀이 있습니다. 이 그룹은 사람들과 매우 활발하게 소통하여 커뮤니티 내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가장 유명한 예로, 도버 재판에서 학생들이 날개로 진화한 뼈의 뾰족한 부분들을 보려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해부해 보라는 조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복잡한 과학적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쉬운 예로 바꾸는 방법에 대한 팁이 더 있으신가요?
제가 좀 건방지게 굴었죠. 하지만 치킨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닭 날개의 뾰족한 부분을 과도기적 변화의 증거로 언급하고 싶었어요. 그 재판에서 제 증언의 몇 가지 요점은 재판 과정을 대중에게 보도하는 기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목적이었어요.
재판 마지막에는 계획된 마지막 질문은 지적 설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의 피해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답변은 준비되어 있었죠. 저는 그런 교육은 아이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든다고 답했습니다.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못 가르친다고요. 그 말은 정확히 제가 원했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2005년에는 입소문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이 뉴스는 사방에 보도되었습니다. 심지어 판사가 판결문에 인용하기도 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그것도 전략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적 설계론자들은 대부분 변호사, 수사학 전문가, 과학을 왜곡하여 주장을 펼치는 편집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정직한 설명을 원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에게 지적 설계를 가르치면 바보가 된다고 한 것은 왜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아이들을 과학에 대해 바보로 만들 거에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아니지만 세금 낭비라는 점에서 그 커뮤니티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과학 커뮤니티 전체에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개선이 가치 있는 활동이라는 점을 어떻게 설득하시겠습니까?
이상주의자이고 싶지만 저는 현실주의자입니다. 40년 동안 교수진 회의를 해오면서 동료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수진 회의에 모여 앉아 우리는 어떤 훌륭한 이니셔티브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각자의 연구실로, 일상적인 업무로 돌아갑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동료들은 일반적으로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행동하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수익은 연구비, 출판물, 학생 지원, 그 밖에 그들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고요. 이것은 제도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개선하면 기부자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대학이 연구자인 여러분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기부자를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지원을 받기 위해 기부자를 유치한다는 것입니다. 기부자를 둘러싼 복잡한 생태계가 존재하지만 대학은 기부자에 대한 접근 흐름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스토리텔링을 통해 기부자들에게 접근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개발실은 모든 부서가 실제로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를 이해할 폭도 없을 뿐 아니라, 기부자들도 대학과 강의실, 연구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기부자들에게는 풍부한 잠재력이 있으며, 개발실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대학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다면 훨씬 더 많이 기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학과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더 지속적인 기금을 확보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케빈 파디안 추천)
- Science Through Story
- ElShafie, S.J. 2018. Making Science Meaningful for Broad Audiences through Stories. Integrative and Comparative Biology 58(6):1213-1223.